2023 주니어 SRE 엔지니어 후레임

나의 2030 연대기

2024. 4. 13. 1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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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

중앙대 전자전기공학부에 현역으로 입학.

당시에는 전/화/기가 취업이 잘된다는 소리를 듣고, 컴공을 선택할 수 있었음에도 전자과를 택했다.

하지만... 죽었다 깨어나도 하기 싫은건 안하는 나였기에, 수업에 출석만 간신히 하는 수준으로 2점대를 유지.

 

2011

4월 25일, 공부로부터 도망에 가깝게 공군행을 택함.

지루한 24개월의 시작... 경상남도 사천에서 2년간 레이더정비병으로 근무.

인트라넷에서 C컴파일러 구해서 테트리스도 짜고, 리듬게임도 만들고, 정보처리산업기사랑 JLPT N1도 취득했으니

지금 생각해보면 아주 시간낭비는 아니었던 것 같다.

 

2013

4월 24일, 전역날에 대대장으로부터 "오늘까지는 군인이니 머리는 자르고 갔으면 좋겠다"라는 개소리를 들으며 제대.

이후 복학시기가 애매해져 어떻게 할까 고민하던 중에, 조부모님의 도움으로 미시간에서 6개월간 어학연수.

지금 생각해보면, 조부모님께는 죄송한 말이지만 캐나다 워홀을 가서 좀더 부딪혀 봤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2015

3월, 300만원을 들고 후쿠오카로 일본 워홀을 가게 된다.

사실상 2학년을 마치고 또 다시 도피행을 선택한 것이나 마찬가지.

최대한 모든 삽질을 해보고 싶다고 느껴서, 컨베이어 벨트 포장, 이삿짐 나르기, 사무실 이전 노가다, 니토리 배달보조, 게스트하우스 청소 등 할 수 있는 허드렛일은 죄다 해봤다. 그리고, 육체노동은 역시 나한테 맞지 않는다는 결론.

그러다가 4월말쯤 한국인 사장 회사에 들어가 일본의약폼 번역, 포장, 판매, 행정, 홈페이지 관리 등의 일을 했다.
비록 직원들에게 갑질(パワハラ)하는 1인 기업(ワンマン企業)이었지만, 자유도가 높았기에 그 부분은 참을 수 있었다.

이것이 내 일본에서의 1년차 생활.

 

2017

6월경, 내 인생의 분기점이 될 비트코인을 알게 된다.

강의실 뒷자리에 앉아 Poloniex에 접속해 적당히 싸보이는 것을 적당히 가격이 오르면 파는 것을 반복했던 수준이었지만,
돈이 벌렸기에 나는 내가 재능이 있는줄 알았다.

그리고 찾아온 8월, 하드포크.
과거 이더리움이 이더리움 클래식과 둘로 쪼개지게 된 전례가 있어서일까, 시장은 경직되어 비트코인은 3000불에서 더 이상 가격이 오르지 않았고 오히려 빠른 시간내에 1800불까지 40% 하락하게 된다. 이때까지만 해도 중국의 채굴장이 전세계 비트코인의 상당수를 점유하던 시기였고, 그 중에서도 우지한(Wu Jihan)이란 작자가 비트코인 하드포크를 진행하면서 나온 것이 비트코인 캐시(BCH).

어쨌거나 나는 코인에 빠져 공부는 뒷전이었고, 학사경고를 받게 된다.
또 다시 휴학.
그리고 10월, 11월, 코인붐이 찾아오고 나는 하나둘 돈을 버는 방법에 눈을 뜨게 된다.

12월이 되자 업비트(Upbit)가 열렸는데, 당시 원화마켓과 BTC마켓 사이에 시세차이가 발생한다는 것을 알았고, API가 공개되기 전의 시기라 이 시세 차이를 메꿔주는 봇이 없던 시기였기에, 나는 200만원을 들고 수동으로 시세 갭을 먹기 위해 하루종일 모니터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이때까지만 해도 이것이 재정거래(arbitrage trading)라 불리는 것인지조차 몰랐다.) 12월말이 되자 내 시드는 5배로 퀀텀점프 해있었다.

 

2018

이래저래 2000만원정도 돈이 모여, 전업을 하기로 결정했다.
수원 광교에 있는 신축 오피스텔에 500/40에 계약, 1월에 입주.

모니터 3대로 하루종일 차트만 봤다.
그렇게 엘리엇파동을 알게 되고, 마침 김프가 40%에 육박하던 시기라 해외 사이트에서 신용카드로 BTC를 구입해 한국 마켓에 파는 식으로 재정거래를 하여 이것으로도 쏠쏠하게 재미를 봤다. (지금 생각해보면 노리스크 하이리턴에 가까운 돈벌이였는데, 왜 좀 더 적극적으로 움직이지 않았는지 모르겠다.)

시드는 2월에 8000,
3월에 5000,
다시 4월에 8000,
5월에 5000을 반복하다가
6월에 8000의 벽을 넘어,
1.5억(당시 달러로는 $133,000)을 달성하였다.

나는 승승장구하여 거의 10연승을 하고 있던 때라 자신감이 충만했고,
비트가 8k까지 상승하던 때에 레버리지 3.3x(당시 메인 거래소로 사용했던 Bitfinex의 최대 레버리지가 이정도였다)로 풀숏에 배팅하는 사고를 친다.

그 뒤로도 2번정도 삽질을 하니, 내 잔고는 너덜너덜해져 다시 최고점으로부터 반토막.
그 전부터 '3번 실수하면 스스로 3진아웃 당하자.'라는 마음가짐이 있었기에, 이 때 트레이딩을 그만두게 된다.

지금 생각해보면 이 선택은 꽤나 현명했다.
차트를 보면 알겠지만, 2018년의 하반기는 거의 가격변동성이 없었을 뿐더러
2018년 12월에는 무지막지한 하락장이 찾아왔는데, 난 그 때 무포 혹은 숏포를 제대로 잡을 수 있었을까? 하는 의구심이 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집에만 틀어박혀 있으면 보나마나 차트를 켜고 거래소에 들어가 버튼을 누를 것이 뻔했기 때문에, 비행기 값도 쌌겠다 열심히 여행을 하러 돌아다녔다.

2018년에만 제주도, 홍콩, 마카오, 일본(홋카이도, 후쿠오카, 오키나와), 베트남, 서유럽(영국, 프랑스, 독일, 네덜란드, 스위스, 이탈리아, 스페인) 한달 일주 등 코로나 전 저렴했던 LCC의 특수를 누려 가성비 좋은 여행을 하고 돌아다녔다.

 

2019

3월에, 2015년 일본 워홀에서 일했던 한국인 사장회사에 정직원으로 들어가게 된다.

나는 분명 입사하기 전 내정통지서를 요구했는데, 당시 받았던 내정통지서에는 미나시에 대한 언급이 없었는데
막상 노동계약서를 작상하려니 없던 미나시 조건이 추가되어 있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입사 전후로 나에 대한 사장의 태도도 상당히 달라져 있었기에, 나는 도일 2주만에 리턴을 택한다.

그리고 반년 정도 국비를 다니다가, 10월에 1:38 경쟁률이던 소프트뱅크 테크놀로지에 서류, SPI까지 통과하여 1차 면접을 앞두던 상황이었다. 근데 왠지, 자신이 없어서 도망가고 싶다는 생각과 함께 사퇴(辞退) 의사를 밝히고 내 백수생활은 이듬해까지 연장...

 

2020

우한 폐렴의 등장.

이미 전세계 16개국을 충분히 돌아다녔기에 여행은 뽕을 뽑은데다 코로나 때문에 해외를 나가고 싶어도 나갈 수 없는 상황... 이 지루한 백수생활도 슬슬 끝내고 싶다고 생각하던 차에, 고등학교 동창으로부터 입사제의를 받았다. 그렇게 한국 나이 30살이 되던 7월에, 첫 사회인이 되었다!

나에게 입사제의 해주었던 친구는 물론, 이 회사의 이사님에게도 여러 인사이트를 많이 받았다. 나는 그 때까지 내 사고의 범위가 그렇게 넓은 줄 몰랐는데(좋은 의미로든 안좋은 의미로든), 필요한 곳에 에너지를 쓰는 법을 알게 되었다.

 

 

2021

2차 코인붐

2017년 12월 20k를 최고점으로 끝이라고 생각했던, 코인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역시나 4년이란 시간은 고점에 물린 사람들을 지치게 만들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는지, 전고점을 가볍게 뚫어버리고 30k까지 직행. 하지만, 하루 6시간 이상 근무를 하며(당시 다니던 회사가 코로나 상황에 배려하여 출퇴근 시간을 1시간씩 단축시켜주었다) 차트를 보고있기란 무리. 나는 내가 눈을 감고 있을 때도 일해주는 채굴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주위에 채굴장에 입주한 사람을 찾기 시작하여, 드디어 연락이 닿았다...!
보증금X, 월세40에 계약체결.
이제 채굴기를 수배할 차례.

당시 수도권을 돌며 VGA를 거래했던 기록

채굴기째로 구매하는 것은 가성비가 안좋다는 것을 알았기에,
직접 채굴기를 만들기로 한다.

극한의 효율충이었기에, 가성비, 전성비를 모두 고려한 뒤 AMD의 VEGA시리즈를 위주로 채굴기를 만들었다.
그리고 채굴코인은 ETH보다도 효율이 좋았던 ERGO를 선택.

사실상, 채굴기간은 6개월 밖에 되지 않았다.
고점을 감지하고, 채굴기를 죄다 팔아버렸기 때문이다.

3대의 채굴기는 각각 30~40%의 이득을 남기고 팔 수 있었다.
1차 채굴 삽질은 이로서 끝.

 

2022

2차 채굴 스토리다.
채굴 얘기는 쓰다보니 재미 없는거 같아서 이 부분은 적당히 쓰도록 하겠다.

당시 하드디스크(HDD)로 채굴을 할 수 있는 코인이 등장한다는 소식을 접했다.
이름은 치아(CHIA).

이때까지만 해도 행동력이 넘쳤던 나는, 또 다시 하드를 사서 긁어모으기 시작한다.
그렇게 구매한 하드가, 대략 700TB정도.

결론만 말하자면, 치아 전성시대는 한 달을 채 가지 못했다.
상장과 동시에 줄곧 내리막길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원금의 70%정도만 회수 가능했고, 하드 400TB 정도는 아직도 보유중이다.
(슬슬 USDJPY도 고점 같으니 이것또한 전부 팔아치우려고 한다.)

 

2023

두번째 회사

다니던 회사가 1월에 문을 닫았다.

2월에 강남 교보타워에 있는 금융SI 회사로 옮겼는데, 이곳에서의 사건이 내가 다시금 한국을 벗어나게 만든 원동력이 된다.

개꼰대회사였다.

우리 팀에 전무가 있었는데, 온보딩 때 1:1 교육을 했다.
신용카드의 역사에 대해 설명해주는데 아무리 생각해봐도 내가 알고있던 지식과는 다른 내용을 설명해주더라.
(신용카드의 유래가 미국이 아니고 영국이라는둥) 그래서 구글링해서 자료를 찾아 보여드렸더니 기분이 언짢았는지, 다음 회의내내 회의는 듣지도 않고 폰으로 그것만 찾아보고 있더라. (사실이 아닌데 나올리가 있나?)

다음 온보딩 때도 그 전무랑 1:1이었는데, 지난 시간의 일이 어지간히 기분이 상했는지 ‘요즘 MZ들은 싸가지가 없다’등의 폭언을 하더라. 그러고는 일주일 뒤, 나는 팀장으로부터 ‘후레임씨는 커뮤니케이션 능력이 부족해서 같이 일하기 힘들거 같아요.’ 라는 얘기듣고 권고사직(사실상 부당해고) 당했다.

다음 직장은 무조건 일본으로 가겠다고 다짐했다.

 

세번째 회사(현재)

회사를 나오자마자 제주도랑 나고야, 기후 여행하면서 그동안 못했던 리프레시도 좀 하고 4월이 되자마자 이력서, 직무경력서 갱신해서 링크드인이랑 국내, 일본 헤드헌터한테 골고루 뿌렸다.

사실, 이전에도 소뱅이랑 야후는 면접까지 간 적이 있던터라 이번에도 준비 자체는 크게 어렵지 않았다.
그렇게 4월 한 달 동안 10사에 엔트리해서 4사 서류 통과하고, 2사 최종 내정.

  1. NC재팬 웹 엔지니어 포지션
  2. 지금 재직중인 CRM솔루션 회사

먼저, NC재팬.
여기를 선택하지 않은 이유는, 면접을 하다가 알게된건데 팀 전원이 한국인이었다. 한국계 회사여도 일본법인이니깐 일본인들이랑 일할거라는 기대를 했는데, 갔다가는 또 비슷한 꼴 볼거 같아서 그냥 내정사퇴했다. 이것 때문에 연수입은 거의 100만엔 줄었지만.

그리고, 지금 다니는 회사.
여기는 입사하기 전부터 감동이었다.

후쿠오카 지사에서 이미 일하고 있던 한국인 직원을 써보고 괜찮으니 한국인인 나를 추가로 뽑은건데, 외국에서 COE 받고 입사한건 이 회사에 내가 처음이라 인사팀이 불나게 발로 뛰면서 행정처리를 해주었다. 그리고 부동산도 소개받고, 입주 전까지 머물 곳이 없으니 위클리맨션도 계약해주었다. 입국하는 날은 나리타 공항까지 임원이 캐쥬얼면담 봤던 인사팀 직원을 데리고 직접 공항까지 운전하여 와주었다. 내가 언제 이런 호사를 또 누려볼까.

그렇게 회사에 잘 적응하여 지금은 입사 10개월 차가 되었다.
지금 회사에 입사한 후의 이야기는 추후에 다시 써볼까 한다.

 

그래서 결론이 뭐냐?

뭐든지 남말 들으면 후회한다.
결정도 내가 하고 책임도 내가 지는 주체적인 인생이 BE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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